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2억짜리 가방, 버킨백
가수이자 배우 겸 모델 제인 맬러리 버킨(Jane Mallory Birkin)이 7월 16일 별세했다. 향년 76세. 생전 그는 에르메스(HERMES) 뮤즈이자 프렌치 시크 스타일로 오랜 시간 패션 아이콘으로 여겨졌으며, 국내에선 이효리의 롤모델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스타일은 국내외 패션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전성기 시절 패션은 지금까지 추앙받고 있다. 패션 외에도 가수 겸 배우로서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그중 그의 이름을 차용해 만든 ‘버킨백’은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핸드백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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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킨백은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에르메스는 버킨백 이전부터 오랜 역사와 장인정신 브랜드로 유명했지만, 버킨백의 명성으로 인해 에르메스는 세계에서 가장 손꼽는 하우스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1983년, 우연한 만남으로 탄생한 버킨백의 이야기와 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
제인 맬러리 버킨
버킨은 1946년 영국 해군 소령이자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파이로 활동한 아버지와 배우겸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후반 버킨은 프랑스 영화 슬로건(Slogan)오디션에서 작곡가이자 배우로 활동한 *세르쥬 갱스부르(Serge Gainsbourg)를 만난다. 세르쥬 갱스부르는 다양한 샹송 히트곡을 만든 작곡가이자 배우로 버킨의 히트곡 쥬뗌 므와농 쁠뤼(Je T’aime… Moi Non Plus)를 만든 장본인이다.
해당 곡은 노골적인 가사와 신음 소리를 연상시키는 소리로 인해 외설스럽다는 평가를 받아 유럽 각지에서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여배우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특이점으로 인해 유럽 여러 나라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해당곡은 영국 차트 1위까지 올랐다.
* 둘은 동거 관계를 유지하며 약 13년간 함께했지만, 세르쥬의 끊임없는 바람과 마약 그리고 술을 일삼는 삶으로 인해 결국 헤어지게 된다.
우연한 만남으로 탄생한 버킨백
1983년 런던행 비행기를 탄 버킨. 그는 우연히 에르메스 5대 회장 장 루이 뒤마(Jean Louis Dumas Hermes)의 옆좌석에 앉게 된다. 자리에 앉기 전 당시 자주 들고 다니던 *라피아 백을 위쪽 짐칸에 넣으려다 실수로 내용물을 쏟아버렸다. 버킨의 짐들이 뒤마에게 떨어져 황급히 사과했고, 뒤마에게 튼튼하고 잠금 기능이 있어 실용적인 가죽 가방을 찾기 어렵다며 푸념했다.
*라피아 백: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가방
뒤마는 이 말에 영감 받고, 버킨에게 이상적인 가죽 가방에 관해 물었다. 버킨은 “에르메스 캘리백보다 크고 슈트케이스 보다 작은 가방”을 제안했고 뒤마는 즉석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비행기 위생 봉투에 그렸다. 위생 봉투에 그린 가방 디자인을 토대로 개발에 들어갔고, 1년 후인 1984년에 첫 번째 버킨백이 탄생했다. 그가 언급한 조건대로 ‘튼튼한 가죽과 넉넉한 내부, 거기에 잠금장치’까지 포함해 여행 중 안전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뒤마는 버킨에게 감사의 의미로 첫 번째 버킨백에 그의 이니셜 J.B를 넣어 선물했다. 초창기 버킨백은 약 250만 원에 판매했으나, 현재는 약 1,500만 원부터 최대 약 2억 원까지 호가한다.
이건 가방이 아니야, 버킨이야
버킨백은 80년대 명품 시장을 점령한 샤넬 백과 다르게 고급스러운 가죽과 로고를 빼 절제된 스타일로 탄생했다. 그로 인해 첫 발매 당시 반응은 지금과 다르게 저조했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인기를 받으며 2001년 섹스 앤 더 시티 시즌 4 에피소드 명대사 “It’s not a bag, It’s a Birkin.”로 인해 셀럽들이 사랑하는 ‘잇 백’으로 자리매김했다.
5년 기다리실 수 있죠?
일반적인 버킨백 구매 방법은 에르메스 매장에서 버킨백보다 몇 배의 돈을 지출 후 구매 이력을 채우는 방법이다. 최상급 VIP 고객이 될 경우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의 스페셜 오더도 가능하지만, 스페셜 오더로 진행할 경우 최소 몇 달부터 최대 몇 년까지 걸린다.
버킨백을 구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먼저 에르메스 가죽 작업장에서 일을 하려면 약 7~10년의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교육 과정을 거친 장인들은 미싱이나 기계를 쓰지 않고 수작업으로만 진행하다 보니 버킨백 하나 만드는데 최대 48시간까지 소요되며, 불량이 나올 경우 바로 폐기한다. 버킨백은 돈과 권력이 있어도 희소성으로 인해 쉽게 살 수 없는 가방이다 보니 버킨백은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에르메스 장인들은 새들 스티칭 기법을 사용해 버킨백을 만드는데, 해당 기법은 말안장을 만들 때 사용하는 기법으로 미싱 기계를 사용할 때보다 가죽 제품을 훨씬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
버킨백의 위기
사고 싶어도 못사는 버킨백도 위기가 있었다. 2015년 6월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가 산채로 자행되는 동물 학대 장면을 폭로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 나온 곳은 에르메스 가죽공장에 악어가죽을 납품하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와 미국 텍사스주 악어 농장. 영상 속 농장 관리인은 “1년에 4만 3천 마리의 악어가죽을 벗기는데, 한 개의 버킨백을 만들기 위해 악어 세 마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버킨은 해당 영상을 보고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며 제조 공정에 대한 국제기준이 마련되기까지 버킨백의 이름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내 이름이 붙은 에르메스 가방을 만들기 위해 악어들이 잔인하게 죽었다.”며 “국제적인 표준이 정착될 때까지 버킨백의 이름을 바꾸길 요청한다.”고 밝혔다.
버킨백 상표권은 에르메스가 소유하고 있어 버킨의 요구를 무시해도 법적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제인 버킨의 영향력과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될 우려가 있어 에르메스는 “10년간 가죽 농장들에 윤리 기준을 준수해 왔고, 영상 속 농장의 악어가죽은 버킨백에 사용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후 에르메스는 야생동물 거래를 규정한 국제 협약을 준수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버킨의 요청에 “협력사에 윤리적인 악어 처리를 요구할 것’이라 답하며 소극적인 대응을 보여줬다.
버킨백을 모으는 셀럽
그럼에도 버킨백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성공적인 희소성 마케팅으로 버킨백은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제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셀럽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르메스 열성 팬으로 알려진 빅토리아 베컴(Victoria Beckham)은 약 1백 개가 넘는 버킨 백을 갖고 있다 알려졌고, 카일리 제너(Kylie Jenner)는 본인이 소유한 1억짜리 악어가죽으로 만든 버킨백을 방송에서 공개했다. 그 외에도 카디 비(Cardi B)는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버킨백 컬렉션을 SNS에 여러 차례 공개했으며, 카디 비 SNS에 올린 버킨백만 27개로 알려져 실제로 갖고 있는 버킨백은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자들의 로망이었던 버킨백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생전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는 12개 이상의 버킨 백을 소유했고, 2017년 바자 인터뷰에서 드레이크(Drake)는 미래의 부인을 위해 버킨백을 수집하고 있다고 전했다. 예(Ye, Kanye West)는 전 여자친구 줄리아 폭스(Julia Fox)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친구들에게 버킨백을 선물했다. 높은 가격과 긴 대기 명단으로 인해 버킨백은 어느새 부의 상징이 됐지만, 정작 버킨이 소유한 버킨백은 다섯 개밖에 없다고 알려졌다.
튼튼한 가죽 가방 버킨백
버킨이 필요로 했던 튼튼한 가죽 가방 ‘버킨백’은 패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우연처럼 만들어진 버킨백은 누군가에게는 부의 상징이지만, 정작 그는 버킨백과 함께 오래된 옷을 입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다.
시대를 초월한 스타일로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제인 버킨. 세계적인 셀럽이 됐음에도 겸손한 매력으로 사랑 받은 버킨은 2021년 뇌졸중을 앓으면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고, 세상을 떠나기 전 심장 질환을 앓았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프랑스 파리 시장은 “영국인 중 가장 파리지앵이라 할 수 있는 그녀가 우리를 떠났습니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했던 그의 노래, 웃음, 비교할 수 없는 그만의 특별한 억양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가 남긴 스타일과 영향력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며, 제인 버킨의 이름은 시대를 넘나드는 매력을 표현하는 수식어가 될 것이다.
